- 2007년 8월 8일 작성한 글, 미완성인 채로 이제서야 포스팅하다.
여름휴가 마지막 날인 일요일,
아내와 나는, '화려한 휴가'를 보기로 하고, 아이들 일찍 재우기 작전을 세웠다. 퇴근시각이 늦는 아빠와 놀기 위해 밤 늦게까지 기다리며 노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아이들.
저녁밥을 먹이고 월드컵 경기장 시민공원에 나갔다. (차로 10분쯤은 가야한다.)
일반 주택에 사는 아이들에게 그네와 미끄럼틀만으로도 온 세상이 신나는 놀이터였고,
역시 우리의 기대대로, 공원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둘다 새근 새근 잠들었다.
(사실 아이들이 얼른 잠들지 않아서, 집 근처를 차로 2바퀴 돌았다. 아이들이 다 잠들 때까지.
좀 치사한 방법이긴 했지만, 아이들이 크면 언젠가 양해를 구하리라 . 너희들도 커서 애낳고 살아봐 아빠 심정 이해될 거야.^^; )
'태극기 휘날리며'
시민들이 계엄군의 몽둥이 맞아 죽어가던 처절한 장면에서, 내내 '태극기 휘날리며'의 백병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그 시절을 살았더라면, 인민군과 국군의 산악 백병전에서, 나는 '장동건'도 아니었을테고, 원빈도, 공형진도 아니었을 것이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포탄이 빗발치던 황폐한 산을 넘어,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진격을 해야했던, 1초의 방심도 허용할 틈도 없이 총과 칼로 백병전을 벌이다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던, 피를 토하며 이름없이 죽어가던 그 병사였을 것이다. 나는 그 잔인한 장면들을, 수없이 반복해서 총칼에 잔인하게 죽어가는 내 자신의 모습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산을 뒤덮은 시체들, 영화가 한 장면으로 스쳐지나가버린 그 장면속에는, 내 주검과, 내 형제들, 친구들의 주검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내 꿈과 희망들, 친구들과의 우정과 20여년 넘게 살아왔을 인생이 주검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엑스트라들이 심심풀이 흥미용으로 무수히 죽어가는 홍콩느와르 같은 영화를 싫어했었다.)
바보사, 다현사,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역사책 100권을 읽은들 전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사람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키는 건, 전쟁에 대한 기억이나 상처가 아니라 전투에 대한 기억임을. 단 한줌의 '인간의 존엄성'이라도 무의미할 수 밖에 없는, 그 살육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소름끼치게 받아들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이후 비로소 나는, 대학시절 농활을 가서 만났던, 한국전쟁에 대한 마을 어르신의 확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드리는 위로.
10일전만해도 평범하게 출근하던 직장앞에서, 담배를 사던 가게앞에서, 점심을 먹던 식당앞에서, 한국전쟁도 아니었는데. 이 전투(학살)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직장에 출근하고 점심을 먹고 담배를 피우는 일상을...
한 도시의 영혼이 집단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
온 도시의 사람들이 참여했던 백병전, 전투에 대한 기억과 상처.
부모를, 자식을, 형제를, 친구를 하루 아침에 잃고, 오히려 폭도로 몰린 채 숨죽이며, 읍소할 수 없고 정당한 항의조차 할 수 없이,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도가 아니었음을,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목숨을 걸고 이웃들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대구출신의 김지훈 감독의 인터뷰 내용은 아직도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고교 시절까지도 5.18을 '폭동'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주위 어른들에게서 들어온 이야기라고 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도 5.18을 폭동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을까. '폭동'이라는 명명은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어 한없이 오래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들, 망월묘역에 6월항쟁 만큼 높은 기념탑이 건립이 된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가슴속에 박힌 '폭동'이라는 인식을 아직도 모두 걷어낼 수 없음을 늘 뼈아프게 가슴앓이를 해왔었다.
영화 시사회때 5.18 유족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눈물겨웠던 싸움.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드리는 위로.
항쟁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서부터, 많은 작가들이 마음속에서 부채의식을 털어낼 수 없었던, 시와 소설을 넘어, 항쟁의 기록을 정면에서 생생하게 재연해낸 '화려한 휴가'까지.
배우 박철민은 인터뷰에서 "5월마다 나왔던 다큐멘터리·사진전·증언들, 이런 것들이 아닌 영화였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가장 큰 희망은 여기에 있다.
영화가 비록 '신파, 신파, 신파'라고 목청 높이 외치며 '흥행, 돈, 돈' 떠들어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로 현장을 생생하게 재연해 보여줌으로써 이제 누구도 광주를 폭도라고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쓸쓸한 위로가 되었고, 그 것만으로도, 살아남은 도시의 사람들은 막혔던 가슴이 뚫리고 무너져 내려 엉엉엉 소리내어 울며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했는데,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쉬움과 고마움.
에필로그
김지훈 감독에게 드리는 감사의 인사.
이 땅의 많은, 5.18의 실상을 모르는 이들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성공시켜주어서.
가장 잘한 캐스팅 - 이준기 (많은 여학생, 청소년들이 이준기를 보러 영화관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실패했다면, 끼리끼리만의 쓸쓸한 위로와, 또 한번의 설레임과 실망들.
그리고,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서 무수히 많은 '비평'과 비난을 한몸에 받았을지도 모를터.
실제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죽어간 이들은, 항쟁 지도부중에서도 학생시민군 지도부였다는 것. 여기서 그 유명한 윤상원 열사가 등장한다.
가장 기억에 남은 대사는,
아내 : 우린 폭도가 아니야
나 : 잊지말아주세요.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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